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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대문시장의 전신 — 조선 한양 3대 시장 칠패의 새벽 장터

|기록: 서울역사 에디터
종로만 시장이 아니었다. 새벽녘 거래가 활발했던 조선의 칠패시장, 지금 남대문시장의 뿌리다.

남대문시장의 전신 — 조선 한양 3대 시장 칠패의 새벽 장터

남대문시장은 서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곳이다. 오래됐고, 크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없는 게 없다.

옷도 있고, 그릇도 있고, 먹거리도 있고, 길을 잃을 자유까지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시장의 뿌리가 조선시대 새벽 장터에 닿아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남대문시장 일대에는 **칠패시장(七牌市場)**이라는 장터가 있었다.

그리고 이 시장, 꽤 독특했다.

남들 다 자는 새벽녘부터 활기를 띠었기 때문이다.


조선 한양의 3대 시장

조선시대 한양에는 공식 상점가인 육의전이 있었다. 종로 일대에 자리한 육의전은 나라의 허가를 받은 상인들이 고급 물품을 팔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조선판 프리미엄 상권이다.

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꼭 그런 반듯한 상점에서만 굴러가지는 않았다. 진짜 생활 물자는 좀 더 시끌벅적하고, 빠르고, 생생한 장터에서 오갔다.

그 중심에 있던 곳이 바로 한양 3대 시장이다.

  • 운종가(雲從街): 종로 일대. 사람과 물건이 구름처럼 몰려든 번화가.
  • 이현(梨峴): 지금의 동대문 쪽. 광장시장 근처로 이어지는 상업지.
  • 칠패(七牌): 남대문 밖, 지금의 남대문시장 일대.

이 셋 중 칠패는 특히 성격이 뚜렷했다. 종로가 번듯한 상업 거리였다면, 칠패는 새벽부터 팔 걷어붙이고 돌아가는 실전형 시장이었다.

이유는 하나.

칠패는 새벽녘 거래가 특히 활발했다.


새벽녘부터 활기를 띤 시장

칠패시장은 파루가 울리는 새벽 무렵부터 활기를 띠었다. 밤새 닫혀 있던 도성의 문이 열리고 통금이 풀리는 시간대와 맞물려, 시장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기도 전에, 칠패는 먼저 움직였다.

왜 하필 새벽이었을까. 답은 물건에 있다. 칠패의 핵심 상품은 어물, 즉 생선류였다.

한강과 서해 쪽에서 들어온 생선은 시간이 생명이다. 싱싱할 때 팔아야 값이 나가고, 날이 더워지기 전에 거래를 끝내야 했다. 그러니 해가 중천에 뜬 뒤 느긋하게 장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노량진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 같은 느낌이다. 남들은 아직 이불 속에 있을 때, 시장에서는 이미 하루의 가격이 정해지고 있었다.

칠패를 찾은 사람들도 주로 서민이었다. 종로 육의전이 포목, 한지, 비단처럼 격식 있는 물건을 다루는 상점가였다면, 칠패는 훨씬 생활에 가까웠다.

생선 냄새, 흙 묻은 채소, 소금 자루, 짐을 멘 상인들, 흥정하는 목소리.

말하자면 칠패는 조선 한양의 새벽을 가장 먼저 깨우는 시장이었다.


칠패에서 무엇을 팔았나

칠패의 대표 상품은 어물이었다. 하지만 생선만 팔던 곳은 아니었다.

남대문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과 물자가 남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남대문 밖 장터를 키웠다.

쌀, 채소, 소금, 생선 같은 생활 물자가 모였고, 지방 상인과 한양 상인이 만났다. 누군가는 물건을 팔고, 누군가는 되팔 물건을 샀고, 누군가는 그날 밥상에 올릴 생선을 골랐다.

칠패는 단순한 장터가 아니라 한양의 물류가 숨 쉬는 입구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칠패는 더 커졌다. 특히 1791년 정조 때 시행된 신해통공은 시장 분위기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독점권, 즉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일반 상인들의 활동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쉽게 말해, “허가받은 사람만 장사한다”는 질서가 조금씩 느슨해지고, 더 많은 상인들이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남대문 밖 칠패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칠패에서 남대문시장으로

칠패시장은 조선 말기를 거치며 점점 규모가 커졌다. 개항 이후에는 외국 물품과 새로운 상업 방식까지 들어오면서 시장은 더 복잡하고 활발한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지금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

물론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 조선시대 칠패시장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건물도, 상품도, 상인 조직도, 거래 방식도 모두 달라졌다.

하지만 중요한 흐름은 이어진다.

남대문 밖에 사람들이 모이고, 물건이 모이고, 새벽부터 장사가 시작되던 자리. 그 오래된 상업의 기억이 오늘날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 남대문시장에서 새벽부터 불을 켜고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조선시대 칠패 장터의 풍경과 아주 멀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마무리

조선의 칠패시장은 화려한 시장은 아니었다. 왕실 물건을 파는 고급 상점도 아니었고, 양반들이 느긋하게 구경하는 쇼핑 거리도 아니었다.

대신 그곳에는 생활이 있었다.

새벽녘부터 움직이는 상인들. 밤새 들어온 생선. 흙 묻은 채소. 소금 자루. 값을 깎는 손님과 목청 높이는 장사꾼.

칠패시장은 한양의 하루를 가장 먼저 열던 서민들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그 장터의 흐름이 조선 후기부터 근대와 현대를 지나 지금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꽤 멋지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의 심장 중 하나가 아직도 뛰고 있는 셈이니까.

항목 내용
위치 숭례문(남대문) 밖, 현 남대문시장 일대
개장 시간 파루 무렵 새벽녘부터 거래 활발
주력 상품 어물(생선류), 채소, 소금 등
이용 계층 서민 중심
한양 3대 시장 운종가·이현·칠패
현재 남대문시장으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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