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선 과거시험, 한양으로 몰려든 수험생들의 처절한 일상
가문의 영광을 위해 전국에서 한양으로 몰려들었던 조선 선비들의 치열한 과거시험 도전기를 소개합니다.
| 항목 | 내용 |
|---|---|
| 정기 주기 | 3년 (식년시) |
| 최종 장소 | 창경궁 등 궁궐 내 |
| 최고 영예 | 장원급제 (갑과 1등) |
| 합격 행사 | 유가 (한양 거리 행진) |
수십 년간 책과 씨름하며 한양 땅을 밟았던 그 시절 수험생들의 간절함,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참 닮아 있죠?
조선판 수능, 인생을 걸었던 시험
현대 한국에서 수능이 인생을 바꾸는 관문이라면, 조선에서는 **과거(科擧)**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면 가문 전체가 신분 상승하고, 낙방하면 고향으로 쓸쓸히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떤 선비들은 수십 년을 시험만 보다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이 과거시험의 최종 무대는 언제나 한양이었습니다.
과거시험, 어떻게 치러졌나
과거시험은 크게 3단계로 나뉩니다.
소과(小科) —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며 각각 유교 경전 해석과 문장 실력을 겨뤘습니다.
이 단계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이 생겼습니다.
대과(大科) — 문과의 최종 관문으로, 초시·복시·전시 3단계를 거쳤습니다.
전시(殿試)는 왕이 직접 참관하는 최종 시험이었습니다.
무과(武科)와 잡과(雜科) — 군인을 선발하는 무과와 의학·법률·통역 등 기술직을 뽑는 잡과도 있었습니다.
식년시(式年試)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렸고, 그 외 별시(別試)·증광시(增廣試) 등 비정기 시험도 수시로 치러졌습니다.
한양으로 몰려드는 수험생들
시험 때가 되면 전국에서 수천 명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지방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몇 주씩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수험생은 배를 타고, 함경도에서 온 수험생은 눈길을 헤치며 왔습니다.
문제는 숙박이었습니다.
한양의 객주(여관)는 수험 기간에 방을 구하기 하늘의 별 따기였고, 돈 없는 선비들은 절이나 지인의 집, 심지어 노상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대의 고시원 문제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시험장 풍경 — 부정행위의 역사
조선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협서(夾書) — 책이나 쪽지를 옷 속에 숨겨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답안지가 적힌 종이를 속옷에 바느질해 두거나, 글씨를 아주 작게 써서 부채나 신발 밑창에 숨겼습니다.
대리 시험 — 실력 있는 사람을 대신 보내는 방법으로, 심지어 이미 합격한 사람이 돈을 받고 다른 사람 대신 시험을 치러주기도 했습니다.
답안 교체 — 시험관과 짜고 답안지를 바꿔치기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이런 부정이 들통나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련된 시험관도 처벌받았습니다.
조정에서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수험생들의 옷을 뒤지고, 시험관과 수험생의 접촉을 금지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습니다.
합격 후 퍼레이드, 낙방 후 상실감
합격자는 왕 앞에서 최종 시험을 치른 뒤 성적 순으로 등수가 매겨졌습니다.
갑과 1등인 장원급제자는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말을 타고 3일간 한양 거리를 누볐습니다.
앞서 언급한 육조거리의 유가 행진이 바로 이것이었죠.
반면 낙방한 수험생들의 상실감은 현대 수험생 못지않았습니다.
어떤 선비는 50대가 넘어서도 시험장을 드나들었고, 어떤 이는 낙방 후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대의 문학 작품에는 낙방한 선비의 서글픈 심정을 담은 시들이 수도 없이 남아 있습니다.
과거시험이 남긴 것
조선은 500년간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했습니다.
이 제도는 출신 가문보다 학문 실력으로 관직을 얻을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고, 조선 지식인 문화의 근간이 됐습니다.
물론 양반 중심의 시험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능력주의라고 보긴 어렵지만, 당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체계적인 인재 선발 시스템이었습니다.
지금 성균관대학교 자리에 있는 성균관이, 바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조선 최고 교육기관이었다는 사실 — 한양의 공부 열기는 6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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